역사·종교적 깊숙한 뿌리 왕의 길 품은 마을 `호암리` > 실시간

본문 바로가기


실시간
Home > 건강 > 실시간

역사·종교적 깊숙한 뿌리 왕의 길 품은 마을 `호암리`

페이지 정보

김영식 작성일20-09-01 19:28

본문

↑↑ 호암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양북면 호암리는 '왕의 길'이라는 역사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왕의 길'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고도 불리는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장례길이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며 동해구의 바다에 묻힌 대왕의 능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암리를 거쳐야 했다. 이 길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대왕암으로 행차했던 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추령재에 터널이 뚫려 호암리를 거치지 않고도 대왕암에 이를 수 있지만 옛 신라 때는 추령이 워낙 험준해 왕의 행차는 에둘러 호암리를 거쳐야 했다.

                    ↑↑ 월성원전 자매부서인 제3발전소 엔지니어링부 직원들이 호암리 주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호암리에는 또 하나의 문화적 자존심이 있다. 바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기림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사찰은 인도의 승려 광유가 만든 임정사라는 절이었으나 원효대사가 중창하면서 기림사라고 개명했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신문왕이 대왕암을 다녀오면서 이 절의 서쪽 계곡에 머물면서 점심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기림사에 못지않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골굴사도 호암리에 있다. 골굴사는 6세기 인도에서 온 광유 스님이 석굴을 조성해 만든 절이며 국내에서는 유일한 석굴사원이다. 최근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 불무도의 전승사원으로 유명해 국내외의 수련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 김용대 이장과 하인수 전 이장, 최해욱 노인회장, 양금식씨(오른쪽부터)가 마을회관에 모여 호암리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은 호암리는 주민들이 이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고 한다. 김용대 이장은 "59가구 159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호암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비록 주민 수는 적지만 양북면에서는 가장 깊은 역사를 가진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있다"며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면서 화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장의 말대로 호암리의 소득원은 기림사 입구의 몇몇 식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다. 또 더러는 산나물이나 송이버섯과 같은 임산물을 채취해 기림사를 찾는 관광객에게 판매해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기림사 주차장에는 '할머니 장터'가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만든 시장으로 10여명이 마을의 임산물과 농산물을 팔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시장이 서지 않고 있지만 관광객들에게 "호암리 나물만큼 맛있는 나물이 없다"는 말을 들을만큼 인상 깊은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 원효대사가 중건한 기림사의 모습.   
  호암리는 중심마을인 큰마을과 기림사 앞 동계, 입구마을인 밤바우 등 3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범바우마을의 앞산에는 흡사 범이 아가리를 벌린 모양의 범바위와 범이 숨어들었다는 동굴이 있는데 이 범바위가 호암리라는 마을이름의 유래가 됐다. 그러나 지금은 범바위 주변의 수목이 우거져 범의 형용이 가려져 있고 동굴 입구마저 찾기 어렵다. 김용대 이장은 "범바위 주변의 나무를 정돈해 바위가 드러나게 한다면 마을의 유래가 되는 지형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림사와 골굴사 등 신라 고찰을 보유한 호암리가 경주의 대표적인 종교 관광지로 성장하기 위해서 경주시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조선말엽 정3품 벼슬인 비서승을 지낸 최세림을 추모해 지은 정자인 해강정.   
  큰마을 앞산에는 조선말 정3품 벼슬인 비서승에 오른 최세림을 기린 정자 해강정이 있다. 이 정자는 최세림의 아들인 최헌수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는데 경내에 ㄷ자 형태의 연못이 아름답다. 김용대 이장은 "이 정자도 잘만 가꾸면 호암리의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손들이 생업에 바빠서 관리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경주시가 나서서 해강정을 제대로 관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열부 이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효암리 열녀각.   
  큰마을 뒷산에는 열부이씨 정려비가 있다. 열부 이씨는 하학로의 아내로 시부모와 남편을 섬김에 모자람이 없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난치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입으로 피를 흘렸다. 그러나 남편이 기운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칼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끓여 먹였지만 여전히 남편은 죽음의 문턱을 헤매고 있었다. 이씨는 다시 자신의 다리를 베어 끓여서 먹이자 잠시 후 남편의 호흡이 돌아오고 그 후 60여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씨의 아들 응청이 임금에게 이 일을 고해 정려비를 하사받았다.

                      ↑↑ 호암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밤바위. 지금은 삼림이 우거져 그 형상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호암리의 월성원전 자매부서는 제3발전소 엔지니어링부다. 심우식 과장은 "호암리는 양북면에서 가장 유서깊은 마을로 역사, 종교적 의미가 깊어 이 마을의 자매부서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호암리가 경주의 중요한 역사, 종교 관광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매부서에서도 작은 일부터 협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이메일무단수집거부
Copyright © 울릉·독도 신문. All rights reserved.
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