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제32화] 석탈해왕 탄생지의 탄강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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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8-02 19:09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하늘의 기와 동방의 빛을 타고 경주 석(昔)씨의 시조로 동해안 아진포(阿珍浦)에서 탄생하신 석탈해왕의 탄강(誕降)을 기리기 위해, 이씨조선 태종(太宗 서기1401~1418)때 탄강지인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바닷가 아진포 현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워, 시조왕의 영정을 모시고 선비 15명과 장정 30명이 이를 수호하며, 삭망일(朔望日 : 음력으로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분향(焚香) 배례(拜禮)를 올렸고, 춘추(春秋)로는 대왕께 올리는 정성어린 제물들을 진설(陳設)하여 놓고 제주(祭酒) 등을 영정 앞 제상에 올리는 큰 향사(享祀) 대례(大禮)를 올렸다고 한다.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를 석탈해왕의 탄생지로 정하게된 연유를 살펴보면 : 다파나국(多婆那國) 왕비(王妃)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이는 길(吉)한 일이 아니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칠보(七寶)와 비단을 채우고, 그 위에 알(卵)을 얹고 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빌기를 "다행히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면 커서 덕을 닦고 나라를 세워 백세(百世)의 공을 이루고 끝없는 수(壽)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라" 하시며 기원하니 바다에서 적룡(赤龍)이 나타나 호위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가 서기 전(前) 5년 병진(丙辰)년 정월 초삼일이었다.
그 궤를 실은 배가 파도와 바람에 실려 신라 땅 진한(辰韓, 지금의 경주)의 동해안 아진포(阿珍浦)에 다다랐을 때,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발견하여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궤가 바닷가에 닿았을 때 까치들이 우짖어서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 자를 날려 보낸 '석(昔)'을 성(姓)으로 삼고,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탈해는 자라서 제2대 박남해왕(朴南解王)의 사위가 되었고 62세에 박유리왕(朴儒理王)의 뒤를 이어 신라 제4대 임금이 되어 23년간 재위(在位)하였다. 탄강지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는'진한 아진포구'(辰韓 阿珍浦口)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는'계림 동하서지촌(鷄林 東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라 하였으니, 이나저나 아진포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羅兒里)이니 여기가 바로 석탈해왕의 탄생지이다.
이조 태종 때 건립되었던 임해전(臨海殿)은 임진왜란 때(1590년대) 왜인들의 방화로 불타버린 후 250여 년간 형체도 없이 허망하게 지나던 중, 조선 24대 헌종왕(憲宗王) 11년(1845년)에 왕께서 친히 내리신 은덕으로 석탈해왕 탄강유허비석(誕降遺墟碑石)과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碑閣) 건물을 복원하는 일을 석씨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이 지었으며, 상량문(上樑文)은 한문건(韓文建)이 썼고, 비각기는 1847년 이시우(李時愚)가 기록하였다. 동시에 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하마비(下馬碑)도 비각 앞 통로(옛길)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모두는 경상북도 지정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탄강비각을 쉽게 찾아가는 길 : 월성원전 남문(南門) 주차창이 비각 입구임'
1983년 월성원자력발전소 건립시 '석탈해왕 탄강비각'은 발전소 부지 내에 편입되면서부터 원전 기초공사의 터파기(掘鑿) 작업에서 배출된 폐토(廢土)가 탄강비각 앞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등으로 비각 일대의 환경이 날로 황폐화되어 모두가 걱정스러워 하던 중, 석진환 대종회장과 석성환 법인이사장의 노력과 월성원자력발전소의 협조로 주변 2만 평 일대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1999. 12)하게 되었으니, 비각 주변의 경관과 풍치가 최상의 수려한 환경으로 조경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는 바이다.
경상북도와 경주시 그리고 양남면 면민과 월성원자력발전소는 지역의 유일한 문화재이며 자랑인 석탈해왕 탄강지를 홍보하고 자랑하기 위해 탄강비각 이외에도 나아리 해변에 석탈해왕 관련 치적 홍보물을 설치하고 정비하기에 노력하고 있는 바, 첫째로, 나아리 해변에 '제철왕(製鐵王) 석탈해'를 소개하는 대장간 모양의 조형물과 여러개의 동판(銅版)에 석탈해왕이 제철기술 도입으로 철제 농기구와 무기(武器) 생산으로 농민의 복지와 나라의 평안을 이룩한 치적을 알리는 홍보판이 건립되어 있고, 둘째로, 해변을 따라 남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죽전항(竹田港) 방파제의 벽(높이 8m×길이 90m)에 석탈해왕 관련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그림은 ①용(龍)의 엄호를 받으며 보물상자를 실은 배가 바다를 건너오는 장면. ②노파 아진의선이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 ③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든 제철왕의 제품 그림. ④인자하면서도 패기가 넘치는 석탈해왕의 존영. 모두 네 폭의 그림이 방파제의 벽화로 그려저 있다. 셋째로, 석탈해왕 탄강기념공원이다. 배(木船) 위에 보물상자가 있고 상자 안에는 강보에 쌓인 갓난 아기를 바라보는 여인(阿珍義先)의 조형물을 중심으로 포토존, 해수족욕탕(海水足浴湯), 쉼터, 육각정, 화장실 등이 완비된 해변공원이다.
이 곳을 지나면 읍천항 공원이 있고, 연이어 양남 주상절리(柱狀節理)전망대가 있어, 석탈해왕 탄강비각에서 ↔ 제철왕 석탈해 치적동판(銅版) ↔ 죽전항 방파제 벽화 ↔ 석탈해왕 탄생공원 ↔ 주상절리전망대를 연결하는 3km 해안 둘레길을'석탈해왕 길'이라고 부른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를 석탈해왕의 탄생지로 정하게된 연유를 살펴보면 : 다파나국(多婆那國) 왕비(王妃)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이는 길(吉)한 일이 아니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칠보(七寶)와 비단을 채우고, 그 위에 알(卵)을 얹고 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빌기를 "다행히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면 커서 덕을 닦고 나라를 세워 백세(百世)의 공을 이루고 끝없는 수(壽)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라" 하시며 기원하니 바다에서 적룡(赤龍)이 나타나 호위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가 서기 전(前) 5년 병진(丙辰)년 정월 초삼일이었다.
그 궤를 실은 배가 파도와 바람에 실려 신라 땅 진한(辰韓, 지금의 경주)의 동해안 아진포(阿珍浦)에 다다랐을 때,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발견하여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궤가 바닷가에 닿았을 때 까치들이 우짖어서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 자를 날려 보낸 '석(昔)'을 성(姓)으로 삼고,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탈해는 자라서 제2대 박남해왕(朴南解王)의 사위가 되었고 62세에 박유리왕(朴儒理王)의 뒤를 이어 신라 제4대 임금이 되어 23년간 재위(在位)하였다. 탄강지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는'진한 아진포구'(辰韓 阿珍浦口)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는'계림 동하서지촌(鷄林 東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라 하였으니, 이나저나 아진포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羅兒里)이니 여기가 바로 석탈해왕의 탄생지이다.
이조 태종 때 건립되었던 임해전(臨海殿)은 임진왜란 때(1590년대) 왜인들의 방화로 불타버린 후 250여 년간 형체도 없이 허망하게 지나던 중, 조선 24대 헌종왕(憲宗王) 11년(1845년)에 왕께서 친히 내리신 은덕으로 석탈해왕 탄강유허비석(誕降遺墟碑石)과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碑閣) 건물을 복원하는 일을 석씨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이 지었으며, 상량문(上樑文)은 한문건(韓文建)이 썼고, 비각기는 1847년 이시우(李時愚)가 기록하였다. 동시에 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하마비(下馬碑)도 비각 앞 통로(옛길)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모두는 경상북도 지정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탄강비각을 쉽게 찾아가는 길 : 월성원전 남문(南門) 주차창이 비각 입구임'
1983년 월성원자력발전소 건립시 '석탈해왕 탄강비각'은 발전소 부지 내에 편입되면서부터 원전 기초공사의 터파기(掘鑿) 작업에서 배출된 폐토(廢土)가 탄강비각 앞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등으로 비각 일대의 환경이 날로 황폐화되어 모두가 걱정스러워 하던 중, 석진환 대종회장과 석성환 법인이사장의 노력과 월성원자력발전소의 협조로 주변 2만 평 일대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1999. 12)하게 되었으니, 비각 주변의 경관과 풍치가 최상의 수려한 환경으로 조경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는 바이다.
경상북도와 경주시 그리고 양남면 면민과 월성원자력발전소는 지역의 유일한 문화재이며 자랑인 석탈해왕 탄강지를 홍보하고 자랑하기 위해 탄강비각 이외에도 나아리 해변에 석탈해왕 관련 치적 홍보물을 설치하고 정비하기에 노력하고 있는 바, 첫째로, 나아리 해변에 '제철왕(製鐵王) 석탈해'를 소개하는 대장간 모양의 조형물과 여러개의 동판(銅版)에 석탈해왕이 제철기술 도입으로 철제 농기구와 무기(武器) 생산으로 농민의 복지와 나라의 평안을 이룩한 치적을 알리는 홍보판이 건립되어 있고, 둘째로, 해변을 따라 남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죽전항(竹田港) 방파제의 벽(높이 8m×길이 90m)에 석탈해왕 관련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그림은 ①용(龍)의 엄호를 받으며 보물상자를 실은 배가 바다를 건너오는 장면. ②노파 아진의선이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 ③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든 제철왕의 제품 그림. ④인자하면서도 패기가 넘치는 석탈해왕의 존영. 모두 네 폭의 그림이 방파제의 벽화로 그려저 있다. 셋째로, 석탈해왕 탄강기념공원이다. 배(木船) 위에 보물상자가 있고 상자 안에는 강보에 쌓인 갓난 아기를 바라보는 여인(阿珍義先)의 조형물을 중심으로 포토존, 해수족욕탕(海水足浴湯), 쉼터, 육각정, 화장실 등이 완비된 해변공원이다.
이 곳을 지나면 읍천항 공원이 있고, 연이어 양남 주상절리(柱狀節理)전망대가 있어, 석탈해왕 탄강비각에서 ↔ 제철왕 석탈해 치적동판(銅版) ↔ 죽전항 방파제 벽화 ↔ 석탈해왕 탄생공원 ↔ 주상절리전망대를 연결하는 3km 해안 둘레길을'석탈해왕 길'이라고 부른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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