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진 문화칼럼] 함께 사랑하든지, 함께 죽든지 , 까뮈의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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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20-07-15 18:34본문
↑↑ 소설가 서유진잿빛 안개가 덮인 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차량이 끊어진 야심한 밤,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매일 밤 강변도로로 뛰쳐나가는 그가 신경 쇠약으로 회사에 병가를 낸 지 한 달이 지났다. 환청이 심했다. 소리란 소리는 모두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처럼 귀를 때렸다. 너무 캄캄하여 가로등도 죽어버렸고 별들도 몰살당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어 무엇인가의 손아귀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도 가도 도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갉는 소리, 쏴쏴 밀려오는 소리, 푸슬푸슬 허물어지는 소리, 온갖 밤의 소음들이 한데 섞여 그의 귀를 괴롭혔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그가 도움을 얻고자 읽었던―까뮈의 소설 '페스트'에 쓰인 방황하는 망령이었다.
44세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3년 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알베르 까뮈, 그는 7년을 매달린 끝에 '페스트'를 탈고했는데,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 시 사람들의 고통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들은 심연과 봉우리의 중간 거리에 좌초해서,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둥둥 떠돌면서, 갈 바 없는 그날그날과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아서…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기를 수락함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황하는 망령이었다'
재앙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페스트를 태워 죽여버린다는 환상으로 눈이 뒤집혀서 자기 집에 불을 질렀을까. 방화자가 속출했고 당국은 위험을 두고 볼 수 없어 방화자에게 법적 제재를 가했다. 그의 환각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는 도로 가장자리 풀숲 너머의 캄캄한 낭떠러지를 힐끗 보았다.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묻었던 그 구덩이 같았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 구덩이를 분리했지만, 나중에는 체면이고 뭐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뒤범벅으로 시체를 포개어 묻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보태지면서 극도의 공포심이 밀려왔다. 아! 이대로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가족과 친지 동료들은 청년시절 때부터 강한 의지로 숱한 역경을 견디어 온 그가 코로나 19 앞에 이처럼 움츠러들 줄 몰랐다고 한다. 공포는 슬그머니 찾아왔다. 발단은, 잦은 입원으로 늘 노심초사하던 노모에 대한 염려로부터 출발했다. 특이 체질의 병약한 노모가 어느 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아들 몰래 외출을 했는데, 돌아온 후 구토증을 일으키며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토록 부탁했건만 외출을 한 노모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공포와 원망의 눈초리로 구토를 달래고 있는 노모를 집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그날 밤부터 그의 심연에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1340년 경 창궐한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1/3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1800년 초에는 결핵이 유럽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생명을 앗아갔다. 20세기의 스페인 독감 때는 5천만 명이 몰살했다. 1차 세계대전 때의 사망자 수 1,500만의 1/3이 되는 숫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17년 무오년 독감으로 14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2020년 6월 22일 현재, 전 세계는 코로나 19로 466,980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 가운데 한국은 280명의 생명을 잃었다. 그가 이런 통계수치를 떠올린 것은 이겨내려는 그의 무의식의 몸짓이리라. 그가 웃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의 환각이 소설 페스트 속을 표류하다 구명보트를 붙잡는 순간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즐거운 기억을 더듬는 듯한 얼굴로 어떤 이름들을 중얼거렸다. 파늘루, 랑베르, 장 따루, 리외…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신이 내린 벌이라며 성도들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결국 페스트에 희생되지만 재난이 도리어 삶을 향상시키고, 인생길을 제시해준다는 교훈을 남긴다.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는 파리에 두고 온 애인에게 돌아가려고 폐쇄된 도시에서 탈출하기만을 바라고 온갖 수단을 쓰다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고 보건대의 봉사에 합류한다. 생에 대해 명철하게 인식하는 지식인 장 따루도 페스트에 감염되지만 부조리한 인간의 숙명에 반항하며 시민들을 보살피다 후회 없는 생을 마감한다. 성실한 성품의 휴머니스트인 의사 리외는 지고한 인간애로 꿋꿋하게 환자를 보살핀다.
그도 코로나에 무릎을 꿇고 부조리한 이 세상의 재앙에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맞서야 한다는 자각이 그를 붙들어주었다. 의사 리외가 말했다.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그 외의 수단은 없다" "인간이란 항상 혼자서만 살 수 없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나의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나의 직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그는 시야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캄캄하던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저에게도 리외와 같은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는 집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리외의 말을 따라 했다. "코로나가 대체 무엇입니까.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어 무엇인가의 손아귀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도 가도 도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갉는 소리, 쏴쏴 밀려오는 소리, 푸슬푸슬 허물어지는 소리, 온갖 밤의 소음들이 한데 섞여 그의 귀를 괴롭혔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그가 도움을 얻고자 읽었던―까뮈의 소설 '페스트'에 쓰인 방황하는 망령이었다.
44세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3년 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알베르 까뮈, 그는 7년을 매달린 끝에 '페스트'를 탈고했는데,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 시 사람들의 고통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들은 심연과 봉우리의 중간 거리에 좌초해서,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둥둥 떠돌면서, 갈 바 없는 그날그날과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아서…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기를 수락함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황하는 망령이었다'
재앙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페스트를 태워 죽여버린다는 환상으로 눈이 뒤집혀서 자기 집에 불을 질렀을까. 방화자가 속출했고 당국은 위험을 두고 볼 수 없어 방화자에게 법적 제재를 가했다. 그의 환각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는 도로 가장자리 풀숲 너머의 캄캄한 낭떠러지를 힐끗 보았다.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묻었던 그 구덩이 같았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 구덩이를 분리했지만, 나중에는 체면이고 뭐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뒤범벅으로 시체를 포개어 묻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보태지면서 극도의 공포심이 밀려왔다. 아! 이대로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가족과 친지 동료들은 청년시절 때부터 강한 의지로 숱한 역경을 견디어 온 그가 코로나 19 앞에 이처럼 움츠러들 줄 몰랐다고 한다. 공포는 슬그머니 찾아왔다. 발단은, 잦은 입원으로 늘 노심초사하던 노모에 대한 염려로부터 출발했다. 특이 체질의 병약한 노모가 어느 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아들 몰래 외출을 했는데, 돌아온 후 구토증을 일으키며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토록 부탁했건만 외출을 한 노모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공포와 원망의 눈초리로 구토를 달래고 있는 노모를 집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그날 밤부터 그의 심연에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1340년 경 창궐한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1/3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1800년 초에는 결핵이 유럽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생명을 앗아갔다. 20세기의 스페인 독감 때는 5천만 명이 몰살했다. 1차 세계대전 때의 사망자 수 1,500만의 1/3이 되는 숫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17년 무오년 독감으로 14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2020년 6월 22일 현재, 전 세계는 코로나 19로 466,980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 가운데 한국은 280명의 생명을 잃었다. 그가 이런 통계수치를 떠올린 것은 이겨내려는 그의 무의식의 몸짓이리라. 그가 웃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의 환각이 소설 페스트 속을 표류하다 구명보트를 붙잡는 순간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즐거운 기억을 더듬는 듯한 얼굴로 어떤 이름들을 중얼거렸다. 파늘루, 랑베르, 장 따루, 리외…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신이 내린 벌이라며 성도들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결국 페스트에 희생되지만 재난이 도리어 삶을 향상시키고, 인생길을 제시해준다는 교훈을 남긴다.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는 파리에 두고 온 애인에게 돌아가려고 폐쇄된 도시에서 탈출하기만을 바라고 온갖 수단을 쓰다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고 보건대의 봉사에 합류한다. 생에 대해 명철하게 인식하는 지식인 장 따루도 페스트에 감염되지만 부조리한 인간의 숙명에 반항하며 시민들을 보살피다 후회 없는 생을 마감한다. 성실한 성품의 휴머니스트인 의사 리외는 지고한 인간애로 꿋꿋하게 환자를 보살핀다.
그도 코로나에 무릎을 꿇고 부조리한 이 세상의 재앙에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맞서야 한다는 자각이 그를 붙들어주었다. 의사 리외가 말했다.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그 외의 수단은 없다" "인간이란 항상 혼자서만 살 수 없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나의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나의 직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그는 시야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캄캄하던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저에게도 리외와 같은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는 집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리외의 말을 따라 했다. "코로나가 대체 무엇입니까.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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