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 운제산의 아침] 선량들에게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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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대 객원교수 탄탄 작성일20-05-05 18:12본문
↑↑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오랜 역사에서 권력 지향적인 인물들의 골육상쟁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형님의 아들인 조카 단종 임금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세조이다. 충성공 한명회를 앞세워 살생부에 오른 신료들을 속히 입궐케 하는 계략에 궁문에서 바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계유정란 이후에 정권창출에 기여한 공신들을 여덟 차례에 걸쳐 250명을 책봉하니 그들이 바로 훈구파이다.
이들이 권력에 집착하여 요직을 모두 독차지해 부정부패를 저지르니, 재야의 사림들은 언론을 장악하여 공격을 했다. 이후에 훈구파들은 사림파 들을 핍박하여 4대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 임금 때 훈구파들이 물러가고 사림파들이 정권을 잡고 훈구파들은 늙어죽고 윤원형 같은 간신 모리배도 제거되고 완전히 사림의 시대가 되는가 했다. 선조가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을 때에는 외척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사림이 또 정권을 잡고 보니 분열이 되고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벌어지게 된다.
선배와 후배 사람이 갈려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중에 동인이 세력이 생기니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 남인은 퇴계, 북인은 남명의 제자가 많고 북인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많이 일으켜 광해군조정에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북인이 권력을 독점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소북 등 온건파를 모아 관제야당인 남인을 만들었고 남인은 예송논쟁을 일으켜 숙종대 서, 남 당쟁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군주권을 강화키 위해 4색 당파 노, 소론을 고르게 쓰는 탕평책이 대두하게 된다. 정조 때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정국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동정하지 않는 벽파로 나뉘었고 정조가 죽으니, 노론 벽파들은 신유사옥을 일으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 보내었고 순조 때 탕평당 출신의 외척 세력의 권력농단으로 조선 땅은 외세의 전쟁터가 되고 드디어 외놈들에게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조선의 역사에서 하루라도 당쟁의 소용돌이가 멈춘 날이 거의 없다. 조선왕조 500년 우리가 역사에서 만나는 조선은 대립과 갈등이 만연되어 정작 정치의 본질이 무엇이었을까를 진정성 있도록 고민해 봐야 한다. 예의범절과 사대주의는 실리보다 명분, 허명만을 찾으려다가 허구한 날 실패의 연속이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사대부는 권력 쟁취와 권력안보에만 신명을 다했고, 한 쪽이 권력을 틀어쥐면 다른 한 쪽은 사지로 몰아넣고 시대를 역행하여 특권층의 탁상행정은 사대 외교에만 치우쳐, 민초들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외세가 쳐들어오니, 도성을 황급히 비우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의주로 피난을 가는 임금을 향해 돌팔매질 하던 민초의 원성만이 자자했던 불행한 역사였다.
부끄러운 조선의 역사를 깊이성찰해 보라. 날이 새고 날이 저물 때까지 권력투쟁만을 일삼다가 국운은 쇠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민초들은 온갖 수모를 당해 침략 당하고 약탈당하며 가족과 생이별하여야 했고 청나라 오랑캐의 볼모가 되거나 섬나라 왜놈들에게 끌려가 노역으로 죽어가며 불행하고 한 맺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당쟁은 끊임이 없으며 당색은 지역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국론은 분열되어 정권잡기에만 혈안이 되었고 민생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질적인 분열성은 민족 공동체의 위기이며 통일 한국만이 외세의 개입을 막아낼 수 있다. 이념을 떠나 민족의 동질성회복이 우선 선행되어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놀아나지 않으며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드날리지 않겠는가?
이제 새롭게 선량이 된 이들은 국정을 논함에, 국운의 융성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전대미문 국가 최대의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하고 반드시 당리당략을 지양하고 이제는 의사당에서 싸움질 좀 멈추고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행보를 보여 국가의 미래를 밝게 해주길 진실로 고대 할 뿐이다.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 kua348@naver.com
이들이 권력에 집착하여 요직을 모두 독차지해 부정부패를 저지르니, 재야의 사림들은 언론을 장악하여 공격을 했다. 이후에 훈구파들은 사림파 들을 핍박하여 4대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 임금 때 훈구파들이 물러가고 사림파들이 정권을 잡고 훈구파들은 늙어죽고 윤원형 같은 간신 모리배도 제거되고 완전히 사림의 시대가 되는가 했다. 선조가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을 때에는 외척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사림이 또 정권을 잡고 보니 분열이 되고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벌어지게 된다.
선배와 후배 사람이 갈려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중에 동인이 세력이 생기니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 남인은 퇴계, 북인은 남명의 제자가 많고 북인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많이 일으켜 광해군조정에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북인이 권력을 독점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소북 등 온건파를 모아 관제야당인 남인을 만들었고 남인은 예송논쟁을 일으켜 숙종대 서, 남 당쟁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군주권을 강화키 위해 4색 당파 노, 소론을 고르게 쓰는 탕평책이 대두하게 된다. 정조 때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정국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동정하지 않는 벽파로 나뉘었고 정조가 죽으니, 노론 벽파들은 신유사옥을 일으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 보내었고 순조 때 탕평당 출신의 외척 세력의 권력농단으로 조선 땅은 외세의 전쟁터가 되고 드디어 외놈들에게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조선의 역사에서 하루라도 당쟁의 소용돌이가 멈춘 날이 거의 없다. 조선왕조 500년 우리가 역사에서 만나는 조선은 대립과 갈등이 만연되어 정작 정치의 본질이 무엇이었을까를 진정성 있도록 고민해 봐야 한다. 예의범절과 사대주의는 실리보다 명분, 허명만을 찾으려다가 허구한 날 실패의 연속이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사대부는 권력 쟁취와 권력안보에만 신명을 다했고, 한 쪽이 권력을 틀어쥐면 다른 한 쪽은 사지로 몰아넣고 시대를 역행하여 특권층의 탁상행정은 사대 외교에만 치우쳐, 민초들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외세가 쳐들어오니, 도성을 황급히 비우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의주로 피난을 가는 임금을 향해 돌팔매질 하던 민초의 원성만이 자자했던 불행한 역사였다.
부끄러운 조선의 역사를 깊이성찰해 보라. 날이 새고 날이 저물 때까지 권력투쟁만을 일삼다가 국운은 쇠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민초들은 온갖 수모를 당해 침략 당하고 약탈당하며 가족과 생이별하여야 했고 청나라 오랑캐의 볼모가 되거나 섬나라 왜놈들에게 끌려가 노역으로 죽어가며 불행하고 한 맺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당쟁은 끊임이 없으며 당색은 지역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국론은 분열되어 정권잡기에만 혈안이 되었고 민생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질적인 분열성은 민족 공동체의 위기이며 통일 한국만이 외세의 개입을 막아낼 수 있다. 이념을 떠나 민족의 동질성회복이 우선 선행되어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놀아나지 않으며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드날리지 않겠는가?
이제 새롭게 선량이 된 이들은 국정을 논함에, 국운의 융성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전대미문 국가 최대의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하고 반드시 당리당략을 지양하고 이제는 의사당에서 싸움질 좀 멈추고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행보를 보여 국가의 미래를 밝게 해주길 진실로 고대 할 뿐이다.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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