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섭 칼럼] 出必告反必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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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물류 대표 배태섭 작성일20-05-06 20:06본문
↑↑ TS물류 대표 배태섭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효도의 근본이 되는 행동을 고사성어로 알려주셨다. 바로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이라는 글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뵌다'는 뜻이다. 외출할 때와 귀가했을 때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표현한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지침이다. 부모는 자식이 눈앞에 없을 때 늘 노심초사한다. 자식이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거나 터럭이 희끗한 반백의 중년이거나 마찬가지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런 부모의 사랑에 대해 자녀가 지켜야 할 기초적인 덕목을 짧은 경구이지만 명료하게 지적해 준다.
전통적인 가족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나서 자란 중년들은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화목했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조부모님과 함께 한 울타리에서 살았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사촌과 한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다. 적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이 넘는 가족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지내면서도 가지런한 질서가 있었고 따뜻한 정이 흘렀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대대로 물려온 효(孝) 사상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우리가 지켜왔던 미덕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기본은 사라져 버렸고 아예 한집안에 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어느 친구가 자신의 아내가 한 행위에 대해 고통스럽게 고백한 적이 있다. 첫 아이를 낳은 뒤 그 아이가 보고 싶어 첫 칠일이 지나서야 집에 찾아온 아버지가 아이를 싸놓은 강보를 밟았다고 아내가 기겁을 하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 후 부모님은 자식의 집에 찾아오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아이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한 아파트 같은 동 아래 위층에 살면서도 손자가 보고 싶어 불시에 자식의 집에 찾아가는 것이 주저돼 먹을 것을 마련해 전화로 손자를 불러내려 손에 쥐어주면서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 풍토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부모님이 중병에 걸리면 주저 없이 요양원으로 입원시켜 버리는 세태다. 물론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병수발을 들 수 없는 경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도 이 경우는 어김없이 적용되니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게 돼 버렸다.
가정의 달인 5월이면 이 같은 가족문화가 늘 화두가 된다. 부모를 반드시 봉양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쳐야 한다고 항변하지만 지금의 현실로는 언감생심이다. 이미 너무 많이 벗어나 버렸다.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산 선물을 안겨드리면서 가족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어린이날에 아이를 데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원지로, 식당으로 선물가게로 종횡무진 누비는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닌가.
'시경(詩經)'의 해설서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奉養)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구절이 전한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표현된 글귀다. 어버이는 살아 있는 교과서일 수도 있다. 오랜 풍상을 거치면서 살아오셨고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주셨다. '둥치 없는 가지가 없다'는 예사 어른의 말을 되뇌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버이가 없다면 어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어버이를 어떻게 섬기느냐에 따라 훗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을지가 판가름 난다. 아이들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배우며 자라고 언젠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할 것이다.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은 없다. 자식 귀한 줄 안다면 나를 낳아주고 뼈와 살을 키워주신 어버이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 어버이가 이 땅에서 사라진 후 그 때 가서 뒤늦게 한탄을 해도 부질없다.
TS물류 대표 배태섭 kua348@naver.com
전통적인 가족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나서 자란 중년들은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화목했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조부모님과 함께 한 울타리에서 살았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사촌과 한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다. 적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이 넘는 가족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지내면서도 가지런한 질서가 있었고 따뜻한 정이 흘렀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대대로 물려온 효(孝) 사상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우리가 지켜왔던 미덕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기본은 사라져 버렸고 아예 한집안에 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어느 친구가 자신의 아내가 한 행위에 대해 고통스럽게 고백한 적이 있다. 첫 아이를 낳은 뒤 그 아이가 보고 싶어 첫 칠일이 지나서야 집에 찾아온 아버지가 아이를 싸놓은 강보를 밟았다고 아내가 기겁을 하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 후 부모님은 자식의 집에 찾아오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아이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한 아파트 같은 동 아래 위층에 살면서도 손자가 보고 싶어 불시에 자식의 집에 찾아가는 것이 주저돼 먹을 것을 마련해 전화로 손자를 불러내려 손에 쥐어주면서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 풍토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부모님이 중병에 걸리면 주저 없이 요양원으로 입원시켜 버리는 세태다. 물론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병수발을 들 수 없는 경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도 이 경우는 어김없이 적용되니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게 돼 버렸다.
가정의 달인 5월이면 이 같은 가족문화가 늘 화두가 된다. 부모를 반드시 봉양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쳐야 한다고 항변하지만 지금의 현실로는 언감생심이다. 이미 너무 많이 벗어나 버렸다.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산 선물을 안겨드리면서 가족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어린이날에 아이를 데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원지로, 식당으로 선물가게로 종횡무진 누비는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닌가.
'시경(詩經)'의 해설서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奉養)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구절이 전한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표현된 글귀다. 어버이는 살아 있는 교과서일 수도 있다. 오랜 풍상을 거치면서 살아오셨고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주셨다. '둥치 없는 가지가 없다'는 예사 어른의 말을 되뇌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버이가 없다면 어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어버이를 어떻게 섬기느냐에 따라 훗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을지가 판가름 난다. 아이들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배우며 자라고 언젠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할 것이다.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은 없다. 자식 귀한 줄 안다면 나를 낳아주고 뼈와 살을 키워주신 어버이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 어버이가 이 땅에서 사라진 후 그 때 가서 뒤늦게 한탄을 해도 부질없다.
TS물류 대표 배태섭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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