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15. 신라 제11대 석조분왕의 등극
페이지 정보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3-29 20:03본문
[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석조분왕의 가계]
성은 석(昔), 이름(諱)은 조분(助賁)이며 제분(諸賁)이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 : 신라 초기에는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음)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조분이질금(助賁尼叱今), 제분왕(諸賁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9대 석벌휴왕(재위 184∼196)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 골정[骨正 또는 홀쟁(忽爭)]이며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金氏)이다. 왕비는 제10대 내해왕(재위 195∼230)의 딸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석씨(昔氏)이다.
아버지인 골정은 석벌휴왕의 태자(太子)였으나 일찍 죽었고, 석조분왕도 석벌휴왕이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석벌휴왕의 둘째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 석내해(奈解)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내해왕은 자신의 딸을 사촌인 조분왕과 결혼시키고, 죽을 때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서기230년(내해 35) 내해왕이 죽은 뒤에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석조분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석조분왕이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는 현명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지녀 나라사람들이 그를 우럴러 경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조분왕이 치세(治世)한 17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서기230년(경술년 왕원년) 봄에 왕위에 오른 조분이사금은 연충(連忠)을 이찬으로 삼아 군대와 나라일을 맡겼다. 7월에는 왕께서 친히 시조(始祖) 사당을 찾아 엄숙히 배례를 올렸다.
이듬해(신해년 왕2년)에는 내해왕의 아들인 이찬 석우로(昔于老)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을 토벌하고 그 땅을 지방군(地方郡)으로 설치하였다.
서기232년(임자년 왕3년)4월에 왜인들이 갑자기 쳐들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므로 왕께서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적들은 패해 도망하였다. 왕은 날쌘 기병을 보내 이를 추격하여 천여명의 목을 베어 죽이다.
서기233년(계축년 왕4년) '삼국사기'에는 조분왕 때 천재지변도 자주 발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4월에 큰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라가고 집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지는 등의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5월에 왜병들이 동쪽 변방을 깐작거리더니, 7월에는 본격적으로 여러척의 배를 몰고 침범한지라 이찬 석우로(昔于老) 대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막게하니, 우로는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과 사도(沙道)에서 싸우는데, 때마침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세차게 불고있는 바람을 이용할 화력(火力) 작전계획을 세워서 적군을 퇴치하기로 하고 실전에 들어갔다.
바닷가 언덕 위에 장작과 잡목들을 군데군데 높이 쌓은 뒤 불을 붙이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해안에 접근하여 상륙하려는 왜적의 배들을 향해 거센 불씨가 성난 파도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그들의 배가 모두 불타면서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적병들도 우선 살기 위해 전원 물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가 수장하여 전멸하였으니 전쟁 기록상 기발한 작전계획으로 통쾌한 대승의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성은 석(昔), 이름(諱)은 조분(助賁)이며 제분(諸賁)이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 : 신라 초기에는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음)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조분이질금(助賁尼叱今), 제분왕(諸賁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9대 석벌휴왕(재위 184∼196)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 골정[骨正 또는 홀쟁(忽爭)]이며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金氏)이다. 왕비는 제10대 내해왕(재위 195∼230)의 딸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석씨(昔氏)이다.
아버지인 골정은 석벌휴왕의 태자(太子)였으나 일찍 죽었고, 석조분왕도 석벌휴왕이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석벌휴왕의 둘째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 석내해(奈解)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내해왕은 자신의 딸을 사촌인 조분왕과 결혼시키고, 죽을 때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서기230년(내해 35) 내해왕이 죽은 뒤에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석조분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석조분왕이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는 현명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지녀 나라사람들이 그를 우럴러 경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조분왕이 치세(治世)한 17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서기230년(경술년 왕원년) 봄에 왕위에 오른 조분이사금은 연충(連忠)을 이찬으로 삼아 군대와 나라일을 맡겼다. 7월에는 왕께서 친히 시조(始祖) 사당을 찾아 엄숙히 배례를 올렸다.
이듬해(신해년 왕2년)에는 내해왕의 아들인 이찬 석우로(昔于老)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을 토벌하고 그 땅을 지방군(地方郡)으로 설치하였다.
서기232년(임자년 왕3년)4월에 왜인들이 갑자기 쳐들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므로 왕께서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적들은 패해 도망하였다. 왕은 날쌘 기병을 보내 이를 추격하여 천여명의 목을 베어 죽이다.
서기233년(계축년 왕4년) '삼국사기'에는 조분왕 때 천재지변도 자주 발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4월에 큰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라가고 집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지는 등의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5월에 왜병들이 동쪽 변방을 깐작거리더니, 7월에는 본격적으로 여러척의 배를 몰고 침범한지라 이찬 석우로(昔于老) 대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막게하니, 우로는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과 사도(沙道)에서 싸우는데, 때마침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세차게 불고있는 바람을 이용할 화력(火力) 작전계획을 세워서 적군을 퇴치하기로 하고 실전에 들어갔다.
바닷가 언덕 위에 장작과 잡목들을 군데군데 높이 쌓은 뒤 불을 붙이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해안에 접근하여 상륙하려는 왜적의 배들을 향해 거센 불씨가 성난 파도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그들의 배가 모두 불타면서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적병들도 우선 살기 위해 전원 물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가 수장하여 전멸하였으니 전쟁 기록상 기발한 작전계획으로 통쾌한 대승의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