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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동상작] 청도 운문사 품 속 오롯이 피워낸 마음속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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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20-09-0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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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 운문사 가을   
[경북신문=장성재기자] ◆ 동상작 = 변 재 영 
  구월의 운문사 
  길이 아름다운 청도 운문사 솔바람 길을 걷는다. 알싸한 솔향기가 코끝에 와락 달라붙는다. 삶이 지칠 때, 신의 짧은 훈수가 필요할 때 가끔 찾아드는 곳이다. 활개 치듯 창공으로 펼쳐진 노송의 위엄에 몸이 자연스레 낮아진다. 나무는 불국정토에 뿌리내린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불이법문이 아닐까.

  거대한 소나무 군단을 지나면 자연석으로 빚은 비석 하나가 기다린다. 신라 때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 즉 '세속오계'를 적은 비다. 왜 이 비석이 이곳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운문사가 바로 원광이 세속오계를 지은 곳으로 화랑정신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천오백년이 흐른 지금 사람은 부재해도 한민족의 삶의 원형이며 뿌리가 된 그 얼만은 우리의 피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지 않는가. 

  구름이 빚은 운문사, 산문에는 속계와 선계를 갈라놓는 일주문도, 홉뜬 눈과 부르걷은 팔뚝으로 길을 막는 천왕문도 없다. 성불하는데 순서나 조건이 필요하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를 맡기고 에움길을 걸으면 세상과 겉놀던 마음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있다. 축축한 마음 한 자락 널어 말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완만한  비탈이지만 기꺼이 나무계단이 등을 내준다. 층계를 오르는 일은 고행이다. 하지만 이 또한 수행이요 삶의 한 과정일 것이다. 

  천년 비구니의 도량,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어느 한 신승(神僧)이 창건했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족의 호거산, 서쪽의 역산을 잇는 크고 작은 봉우리가 흡사 연꽃잎처럼 겹겹이 절을 에워싸고 있다. 꽃이 품은 절집이라 그런지 가람에 들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포근하다.

  누운 소나무를 보며 들어선 참이다. 범종루 중앙을 관통한 문은 여념 집 대문처럼 편안하다. 세월의 더뎅이가 성성한 전각에서 오랜 세월의 지난함을 읽는다. 저녁예불시간, 앳된 여승이 난타하던 지난날의 법고소리를 떠올린다. 조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는 쇠가죽의 애절한 울림은 산사의 적막을 깨고 호거산 등마루를 두들겼다. 세속의 온갖 생명이 귀를 열고 천년의 소리에 몸을 씻던 그날, 파동이 소멸하면 번민도 사라지는 것일까. 소리가 흩어진 허공에는 극락인 듯 별빛만이 아득했다. 

  반송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어느 고승이 시든 솔가지 하나 꽂아 놓은 것이 오백여 년의 세월을 청정한 장송으로 살고 있다. 발바투 다가선다. 시간은 속이지 못하는가.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피부, 노승의 관절을 닮은 옹이, 세월의 무게에 틀어지고 휘어져 쌍지팡이도 부족한 가지에서 만고의 풍상이 느껴진다. 그래도 잎을 피우고 솔방울을 매다는 힘만은 청춘 못지않다. 불심을 먹고 자란 노목은 서 있는 그 자체로도 살아있는 목탑이요 경전이요 극락의 품이 아니겠는가. 보석 같은 깨달음이 하나 둘 염주에 불도장을 찍을 때마다 알알이 사리로 맺혀 가지마다 오롯이 솔방울로 돋았으리라.

  햇살이 얼굴을 간질인다. 신성한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느린 걸음으로 법륜을 돌고 돌아 비로전에서 멈춘다. 백골단청에서 세월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고색창연하지만 시간을 이기지 못한 퇴락의 애잔함이 아쉬움으로 묻어난다. 받들어 모시는 만큼 마음도 하늘에 닿는 것일까. 부처님 전에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굽히는 노파가 눈에 들어온다. 오직 하늘을 향한 저 두 손은 누구를 위한 몸짓인가. 굽어보는 비로자나불이 빙긋이 웃고 있다. 입가의 미소는 노파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근심을 모두 내려놓으라고….

  전능한 절대자의 품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을까. 부처님의 계시라도 받았는지 예불을 마치고 나서는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 보인다. 삶의 번뇌 속에서 신심을 다한 기도는 큰 불상만큼이나 믿음도 크고 깊어졌으리라. 문득 저마다의 사연에 답을 내놓는 부처님의 심사가 궁금해진다. 하긴 중생들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피를 베푸는 것이 부처님의 셈법이 아니던가. 

  눈이 보살이다. 컴컴한 불단 한구석, 천정에 매달린 나무 조각상이 궁금하다. 스님들은 이 동자 상을 악착보살이라고 부른다. 반야용선은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구원의 배다. 용선을 놓친 보살에게 사공이 밧줄을 던져 주었고 보살은 그 줄에 매달려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일념으로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깨달음을 준다. 나는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삶을 일군 적이 있었던가. 푸른색 머리에 초록상의, 하얀 바지를 입고 외줄에 매달린 보살이 왠지 안쓰럽다.

  걸음을 옮긴다. 바지런한 싸리비 물결을 밟고 도착한 곳은 오백나한전이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들어선다. 벌어진 입이 닫히질 않는다. 오백이나 되는 나한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만상의 묵시 앞에 공기마저 엄숙하게 가라앉는듯하다. 가부좌를 틀고 팔짱을 곱게 지른 아리한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켜잡는다.

  객기가 심했던 유년시절이다. 여물을 썰다가 작두에 아버지의 오른쪽 손가락을 자르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는 농사꾼에게 하필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잃었으니 그 불편이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이 미안해 할까봐 평생 그 뭉툭한 손을 옷소매에 감추고 살았다. 피안에 들 때야 비로소 슬며시 내려놓던 그 손,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음전하게 팔소매를 지른 저 불상 어딘가에는 아버지의 손도 숨겨져 있으리라. 눈물 한줌 쏟아내고 돌아선다.

  걸음은 탑돌이로 이어진다. 대웅전 앞뜰 좌우측에 따스하면서도 단아하게 선 두 탑의 의지가 준엄하다. 생로병사의 굽이마다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을 층층이 이고 천년을 버텨 온 탑이 아닌가.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정갈한 걸음으로 우요삼잡의 예를 갖추고 합장을 푼다.

  단풍이 익어가는 뜰을 걷고 또 걷는다. 새털구름마저 거부한 높푸른 가을하늘은 산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서둘러 익은 아기 단풍, 티 없이 맑은 코스모스의 군무, 여린 산수유가지에도 젖은 가을이 빨갛게 물들고 있다. 모두가 비구니들이 잔잔한 독경으로 피워낸 꽃이요 열매가 아니겠는가.

  한 번 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본다. 노목의 묵은 결에서 천년고찰의 깊은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찰나의 세월을 두고 각축하는 우리네 삶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려놓아야할 시간, 버리는 자유가 소유보다 더 큰 행복임을 왜 진즉에 몰랐을까. 마음의 구름을 걷어낸 비구니의 맑은 미소가 구절초 향기만큼이나 상큼하다.     

  오랜 불교의 숨결 위로 짧은 가을 햇살이 기운다. 엷은 가사(袈裟) 같은 노을빛을 머금은 절집의 단풍이 더욱 붉다. 나는 그곳에다 설익은 나를 내려놓고 조붓한 구름문을 빠져나온다. 저녁 바람이 오스스 인다. "뎅그렁~  뎅그렁~" 풍경소리가 따라 나선다. 청정한 하루를 탁발하려고 찾아간 산사, 오늘만큼은 부처가 되어도 좋으리.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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