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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제37화) 석씨 역사를 기록한 모우각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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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9-0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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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숭신전 앞 뜰의 모우각 안에 세워진 비석의 4면에 각인된 '新羅 昔脫解王 碑銘'(신라 석탈해왕 비명) 제하(題下)의 글이 모두 漢字로 조각된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아래에 적어 본다.

  고도(古都) 경주의 월성(月城)에 옛 석탈해왕의 숭신전이 있으니 바로 왕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이다. 고종(高宗) 무술년(서기1898년) 10월 왕의 후손 필복(必復) 이 창건하고 병오년 서기1906년에 이르러 제사의 향축(香祝)을 내리고 본손으로 수호의 관리를 맡아 이렇게 사액(賜額)한 것이다. 그후 14년 기미년(서기1919년) 필복의 아들 봉장(鳳章)이 본전참봉이 되어 그 아우 봉래(鳳來)와 함께 의논하기를 시조왕을 숭봉하는 의절(儀節)은 다 되었으나 오직 비석이 미비하니 만일 지금 이를 이루지 못하고 넘기게 되면 신원설치(伸寃雪恥)할 수 없어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급히 돈을 내어 곧 전(殿) 뜰에 세우려하여 나에게 실기의 글을 청하는지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왕의 탄생의 이적(異蹟)은 직설(稷楔)과 같으니 왕우의 주고 받음은 우순(虞舜) 같으니 세상에 없는 옛날 성신(聖神)의 기이한 사적을 왕은 겸한지라 여기에 문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의 영광된 일이라, 내 늙고 글을 못한다하여 어찌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데 왕의 성은 석씨요 휘는 탈해이다. 우리나라 동북쪽에 옛날 다파나 국 일명 용성국이 있었는데 그 나라왕 함달파가 여국의 딸에게 장가들어 임신 7년만 만에 큰 알을 낳으니 불길하다고 하여 곧 궤에 칠보와 비단을 넣고 그 위에 알을 얹고서는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거든 성취하여 덕을 닦고 나라를 세워 백세의 공을 세우라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버린 것이다. 기원전 5년 병진년 정월 초삼일 진한(辰韓)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니 이때 서광이 하늘에 이어지고 신기한 까치가 와서 울었다. 마침 해변을 지나던 노파가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궤를 열어보니 알이 저절로 깨어지면서 어린 아이가 나오므로 드디어 거두어 길렀다. 성을 석씨로 한 것은 까치(鵲)작자에서 새조(鳥)자를 버린 것이요. 이름을 탈해(脫解)로 한 것은 궤에서 풀려(解) 벗어(脫)났기 때문이다. 세살에 능통하게 말을 하고 글도 능숙하며 점점 자라면서 풍체가 준수하고 지식과 판단이 남과 달랐다. 을축년(서기5년) 박남해왕이 소문을 듣고 맞이하여 사위로 삼고 국정을 위임했다. 왕이 말년에 명하여 이르기를 "너의 박씨, 석씨 양성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왕위를 이을 것이요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돌아가시매 태자 박유리(儒理)가 자리를 석탈해에게 사양하니 탈해가 이르기를 왕의 자리는 신기(神器)인데 보통사람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내가 듣건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튼튼하더라 하고 떡을 씹어 시험하니 유리가 이가 건치(健齒)라 왕으로 세우니 박유리가 이사금(임금)이다. 박유리왕이 돌아가시매 비로서 박남해왕의 유명에 따라 석탈해가 정사년(서기57년)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김씨 시조 알지(閼智)를 얻어 보좌케하니 재위 23년동안 정치가 크게 흥성하였다. 왕위를 유리왕의 아들 박파사왕에게 선위하고 그 원년(서기80년 경진년) 8월에 세상을 서거하시다. 박씨가 네차례의 왕을 지나고 다시 석씨 벌휴왕(伐休王)이 왕위에 오르니 왕은 풍운을 점쳐 수해와 한해를 미리 알며 사람의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별하므로 나라사람들이 통칭 선인(仙人)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삼대를 이어 왕이 되니 석내해왕(昔奈解王)은 용모가 거룩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석조분왕(昔助賁王)과 석첨해왕(昔沾解王) 또한 그러하였다. 김씨의 첫 왕인 미추왕을 지나 또 석유례왕(昔儒禮王)과 석기림왕(昔基臨王)이 있으니 기림왕이 국호 서라를 신라로 고치었다. 석흘행왕(昔訖解王)에 이르러 김씨 내물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이로부터 석씨는 다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석씨는 모두 8왕 173년을 역임했다.

                     

  왕의 능(陵)은 처음 월성북쪽 양정(壤井)언덕에 있었는데, 문무왕때 이르러 왕이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의 뼈를 소천(疏川)언덕에서 발굴하여 소상(塑像)을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시므로 문무왕이 그 말에 따라 발굴하니 두골의 둘레가 석자 두치요, 신골(身骨)의 길이가 아홉자 일곱치며, 이는 하나의 뼈로 연결되어 있었다. 드디어 동악(東岳) 정상에 사당을 세워 소상을 안치하고 능은 경주북쪽 표암산(瓢岩山) 기슭에 옮겼으며, 탈해왕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왕의 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석씨왕의 전(殿)이 없어 향제(享祭)를 올리지 못하였을 때, 필복이 월성(月城)의 옛터를 자리잡아 소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 부윤(府尹) 권상문에게 알리고, 사림(士林)의 협의를 거쳐 전(殿)을 처음 세워 제모습의 제사를 올리니 이해가 바로 무술년(서기1898년)이다. 마침내 조정에서 예관(禮官) 김영래를 보내어 역대 왕능의 경계를 정하는 기회에 석씨왕의 사실을 아뢰게하고 다시 이근수, 이중하의 상소가 있어 드디어 왕의 윤허가 내리니 이천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이기에 창찬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 숭정(崇禎) 사을사(四乙巳) 즉 서기1845년 헌종11년(을사년)에 왕의 후손 주호(周浩), 문호(文浩)등이 양아산(養兒汕)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는데 양아산이란 고종황제께서 아진포에 왕을 실은 배가 머물렀던 고사를 근거로 그곳 지명에 감명 받으니 이 또한 왕의 사적에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 부기한다. 명하여 이르되 아! 석씨왕은 하늘이 내린 신인(神人)이다. 까치 울고 배가 대니 아진포가 빛나도다. 남해왕 높은 식견 있어 모든 정사 맡겼더니 금옥같이 밝은 교화 팔방에 넘쳤도다. 왕위를 위로 받아 아래로 전해주니 신라에 순(舜)임금의 법도로다. 뒤늦게 우러러 받듬은 착한 후손의 힘이로다. 고도(古都) 월성(月城)에 숭신전(崇信殿)이 높게 우뚝 서니 조두(祖豆)는 많으며 선액(璿額)은 휘황하다. 삼전(三殿)이 정립(鼎立)하여 박, 김과 함께하니 왕의 신령 척강(陟降)하며 여기에 흠향(歆饗)하시기 바라오며 반듯한 돌에 글을 새겨 후손들을 깨우치니 천지와 함께 오래 오래 있으리라.

                     

  보국숭록대부전중추원의장 규정각대제학 청풍 : 김윤식 근찬/숭록대부전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해평 : 윤용구 근서/통사랑권지승문원 부정사 월성 : 최현필 근전/통정대부 경주군수 김한은 교정/종사랑 숭덕전 참봉 박찬배 동감/왕 즉위 후 일천팔백육십사년(신유년) 사월 십오일 세움.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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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